#28 힐링 산책

거의 3주 간을 함께 했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제 한국으로 귀국하셔서, 그리고 훌륭한 절세미녀™ 엄마가 오후에 차를 써야하셔서, 그 외에 여러모로 개비 정과 풀어야 할 한이 더러 있어서, 오늘은 뭔가를 특별히 하기 보다는, 개비 정과 아침부터 하루를 함께 하면서, 대화로 서로를 더 알아가고, 간만에 좋은 날씨를 즐기며 그 간 다소 쌓인 한을 푸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부시시 컨셉의 부녀. 개비 정 머리라도 …

부시시 컨셉의 부녀. 개비 정 머리라도 …

그 간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침에 개비 정을 감당해 주시고, 나름 편안하게 아침을 지냈던 터라, 간만에 개비 정의 “웨이크 어어업~~~“에 깬 아침. 둘 다 헤롱헤롱, 세수도 제대로 안하고 하루를 지낸 부시시한 부녀. 그나마 꾸민듯한 개비 정 드레스는, 사실 지난밤에 입고 잔 드레스라는게 함정.

난 아저씨다 치고, 개비 정만큼은 꾸며주고 싶어서, 머리 묶어줌. 어릴 때는 죽어도 안 묵겠다고 발악하더니, 요즘은 그래도 지도 묶은게 이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잠을 깨며 오붓한 시간 좀 가질겸, 레고로 하루를 시작.

한참을 놀다가 생각해보니, 지난 몇 주간 건물 외벽에 페인트 새로 칠한다고 뒷마당에 뒀던 짐들을 다 여기저기 창고에 치워 뒀었는데, 마침 어제 페인트 작업이 끝났기에, 오늘 다시 짐 정리를 해보기로 다짐. 개비 정 놀으라고 하고, 나는 밖에 창고로 나와서 짐 꺼내고 있는데, 어느새 내 뒤에 와 있는 개비 정

개비 정: 아빠, 같이 하려고 나도 나왔어.

아빠: 그럼 네 짐은 네가 옮길 수 있어?

개비 정: 알았어. 아빠, 열심히 해야되, 알았지? 무거우니까 조심하고. 내가 문 잡아 줄게

아빠: 신발부터 신고 오는건 어떨까?

개비 정: 아. 오케이. 운동화 신어야되. 발 아프니까. 아빠는 운동화 안 신었네? 왜 쓰레빠 신었지? 난 운동화 신을 건데?

창고/뒷마당 짐 정리

창고/뒷마당 짐 정리

그래도, 이제 좀 컸다고 진심 한 몫하는 개비 정. 내가 짐 나를 때 문도 잡아주고, 어디로 옮기라고 말도 안했는데, 지가 예전 뒷마당에 짐이 있던 자리를 기억해서 다 제 자리에 가져다 놓음. 뿌듯하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점점 사람이 되어 가며 그저 즐기고 노는 것 뿐만 아니라 일과 이별 등의 어려움과 슬픔도 알아 간다는게 뭔가 안타깝기도 했다.

훌륭한 절세미녀™ 엄마와 함께 점심을 먹고서, 엄마는 볼일이 있어 나가고, 개비 정과 나는 유모차를 끌고 산책 나옴. 햇빛이 너무 좋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집어 가려 스벅에 들르는데, 마침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 먹는 아이를 발견한 개비 정.

개비 정: 나도 아이스크리이이임!

그래서 동네에 최근 생긴 마트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하나 사갖고 나눠 먹음.

마트에서 이런저런 군것질 거리도 사고, 장도 좀 보고 나오는데

개비 정: 이제 타컨 갈까?

아빠: 집에 안 가고?

개비 정: 오랜만에 타컨 갈래. 장난감 보러 가자! 예에~~~~!

그리하여 약 1.7 km 떨어진 거리를 천천히 산책하며 가는데, 반쯤 지나서 있는 동네 고등학교 축구 경기장에서 펼쳐진 경기에 꽂힌 개비 정 …

동네축구 열혈 팬

동네축구 열혈 팬

30분 가량 경기 관람하는데,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경기 진행 상황이 궁금하신 …

오빠들은 왜 공을 차는거야?

이모 삼촌(관중)은 왜 박수 쳐?

오빠들 뭐하는거야? (축구)

나도 축구 하고 싶다아 …

타컨에 도착해서는 둘 다 화장실이 급해서 우선 화장실부터 들르는데, 나와 자주 공중 화장실을 별말 없이 잘 다니던 개비 정, 오늘 따라

개비 정: 아빠는 왜 피피(역: 쉬)할 때 바지 안 벗어?

아빠: 아빠는 남자라서.

개비 정: [개비 정]은 남자 아니야?

아빠: [개비 정]은 여자지.

개비 정: 아~ 공주라서? 아빠는 그럼 공주 아니야? 아빠 공주 못해서 슬퍼?

이제 같이 화장실 데리고 다닐 날도 얼마 안 남았지 싶은 …

간만의 앰배서더 토이 투어

간만의 앰배서더 토이 투어

장난감 가게를 구경하는데, 내가 정말 애를 잘못 키웠다 싶은건, 이제 살 장난감이 그닥 없다는거. 모든 카테고리 별로 집에 있을건 다 있어서 … 개비 정도 그걸 느꼈는지, 보는 것마다 “이건 집에 똑같은거 있는데~“하며 못 고르는거;;; 가게 전체를 세 바퀴 정도 돌고서는, 평소에 눈길도 안 주던 공, 과학 교보재까지 살펴보다가, 결국은 장난감 사물함 하나 건짐.

이렇게 하루를 지내다 보니 어느덧 오후 네시. 햇살을 즐기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을 향해 슬슬 걸어가고 있는데, 뜬금 없이

개비 정: 아빠.

아빠: 응?

개비 정: [개비 정]은 엄마만 사랑해. 아빠는 안 사랑해.

아빠: 그래? 왜?

개비 정: [개비 정]은 엄마만 사랑해.

아빠: … 그러면 아빠는 슬픈데?

개비 정: 아빠도 슬프고, 엄마도 슬퍼?

아빠: 응.

개비 정: 그려면1 아빠도 사랑해 볼게. 그럼 좋아?

아빠: 고마워.2

도대체 무슨 개소리일까 한참을 고민하며 걷다가, 아무 소리도 없는게 희안해서 보니, 그새 유모차에서 잠든 개비 정 …

귀가길에 잠든 개비 정

귀가길에 잠든 개비 정

집에 도착해서는 깰 때까지 유모차에 조용히 모셔두고, 커피 한 잔 내려 마시며 지난 시간들을 되새겨 보았다.

늘 울고 보채기만 하며 그저 내 인생의 걸림돌이기만 했던 작은 짐승이, 어느새 저렇게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고민하며,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고 사고하는 인간이 되었던지 … 저 어린 생명이 벌써부터 이별의 아픔을 알뿐더러, 자신의 슬픔을 참을 줄도 아는게 대견할 일인지 안타까울 일인지 …

이렇게, 개비 정과 한층 더 가까워진 날도 무사히, 끝.


  1. 오타가 아니라 실제 개비 정 발음
  2. 하루 종일 이와 유사하게 개비 정 속내를 고민하게 하는 아리송한 대화가 오갔지만, 관련된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그리고 무슨 얘기가 오갔던지 나 스스로도 아직 정리가 잘 되지 않아서, 여기에 공유하지는 못하겠다.
공유 댓글
comments powered by Disqus